이권재의 오산이야기 #3

2020. 7. 31. 23:31이권재의 오산 이야기

 

-오산에서 맺은 인연들-

 

고름우유 파동같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1365일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실과 신용을 최우선으로 우유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고, 형편도 좋아졌습니다.

우유대리점을 낸지 12년째 되는 해인 2004,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8월 오산에 새로 개원한 한국병원에 장례식장을 열었습니다.

장례식장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오산에서 맺은 인연이 저를 새로운 사업으로 이끌었습니다.

 

제가 처음 오산에 올라와 대리점을 내고, 살았던 곳은

국도 1호선이 지나는 오산동 시민회관 앞이었습니다.

저보다 몇 년전에 올라 와서,

같은 동네에서 약국을 하던 고향 선배님은,

저희 부부에게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준 평생의 은인입니다.

우유값 수금이 여의치 않아서,

본사에 물품대금을 낼 때는 늘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때마다 약국형님은 모자란 액수를 보충해주시곤 했습니다.

마침 그 약국형님의 고등학교 친구가 한국병원을 개원하는데,

병원내 장례식장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은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장례식장을 한다는 것이,

찝찝하고 불안하기만 했는데,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주고, 천국으로 안내하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입니까?”

처음 장례식장을 열 때, 3억원 가량의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외환은행 오산지점장님께서,

단 하나의 저당, 보증인도 없이 신용만으로 그 큰 돈을 대출해주셨습니다.

뭘 믿고 저에게 그 큰 돈을 꿔주시느냐고 물었더니,

지금까지 사는 모습을 보니, 이권재 당신은 믿을 수 있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따라, 사명감을 갖고 봉사하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산에는 어려운 분이 많았기 때문에,

장례비용을 깎아드리고, 연고가 없는 분의 장례도 많이 치렀습니다.

어느해에는 어려운 집안의 형제들이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밤새 싸우다가,

발인을 앞두고 새벽에 모두 사라져서,

대신 장례를 치른 일도 기억이 납니다.

아내는 장례식장에 필요한 꽃집을 별도로 운영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먹고 살만해졌는데, 계속 마누라 고생을 시킨다

부부가 돈 독이 제대로 올랐다고 힐난 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병에 시달리는 친정오빠 부부와

조카들을 보살펴 왔습니다.

아내가 고집스럽게 꽃집을 한 것은,

남편의 눈치를 보지않고,

당당하게 친정오빠 집안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장례식장 일을 정리했습니다.

이제 또 새로운 일을 찾아서,

도전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유배달을 하면서,

오산은 물론 화성과 평택, 수원 남부에 이르기까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집을 돌며 살아왔습니다.

이승을 떠나는 많은 분들을 배웅하는 일도 했습니다.

제 스스로 새긴 교훈입니다.

 

지금에 만족하고, 편안하게 한곳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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